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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Strom/너의 생각들

헛된 배우자상을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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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헛된배우자상을 깨라!!! -수정판주소복사

작성자 임재천
작성일 2008.01.0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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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 이 사람 입니까? 하고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당연지사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점쟁이가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 셨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사랑은 선택이다. "이 사람 입니다" 선택하고 사랑을 쏟아 붓는 것이다. '상대에게 내 안에 있는 사랑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하시오' 하거나 '내 안에 있는 사랑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상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또는 '상대가 나에게 사랑을 붓도록 유도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사람이구나 선택 하고 온 맘으로 사랑을 쏟아 붓는 것이다. 감정에따라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 한다면 이혼, 간통과 같은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감정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한 사람, 그 사람이 내 사람이다 라고 믿고 사랑을 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그 사람이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사람이 내가 사랑해야할 유일한 이성이기 때문이다.



결혼에 로맨스의 요소가 들어온것은 최근에 있은 일이다. 로맨스가 결혼의 최고 우선 순위가 될 때 우리는 이혼을 쉽게 할 것이다. 왜냐면 로맨스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외모가 이쁘기 때문에 아내로 선택 하는 가? 틀렸다. 아내이기 때문에 이쁜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되는가? 어느 정도 맞을 수 있지만 아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선택 할 수 있겠는가? 누구를 선택 하며 사랑 하겠는가?

배우자의 첫번째 조건은 같은 영적 비전을 공유 하고 있는 가?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 하자면 부르심이 같은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같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마다 부르심은 같지 않다. 전자의 부르심은 주님의 몸된 교회 모두의 부르심이지만 후자의 부르심은 그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각각의 지체가 맡은 부르심이 있다는 것이다. 개개인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부르심을 성취하게 된다. 여기서 개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동체를 말한다. 부르심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 주어진다.(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설명 하겠음) 또 부르심을 설명 하자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이땅에서 하고 계신 일을 보는 눈이고 그 눈에 따라서 결정된다. 같은 부르심이라는 것은 같은 방향에서 혹은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는 눈이다. 부르심이 다르다면 반드시 그 배우자 감을 다시 한번 고려해 봐야 한다.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남편은 하루에 4시간 기도 하는데 아내가 1시간도 기도 하지 않는다면 아내는 남편의 기도 생활을 폄하 하거나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의 사역을 아내가 이해 할 수 없다면 그둘은 같이 살 수 없다. 부부는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돌진 해 나가는 전함과도 같다. 전함의 함장이 서로 다른 지도를 갖고 항해를 해간다면 전장에서 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성경은 가정의 리더는 남편 이라고 분명히 명시 합니다.이 글은 저의 상황을 기초로 합니다.) 또 부르심이 다르다면 그 부부는 갈등을 해결 할 수 있는 기초가 없는 것과 같다. 갈등이 해결 된다 해도 일시적일 뿐이다. 갈등을 해결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항상 죽어야 한다. 죽는다는 의미는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부르심의 죽음이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결혼이 많이 깨어진 것을 당신은 아는가? 정말 부르심을 이해하고 있는 자라면 이 기준이 왜 배우자를 고르는 첫번째 이유가 되어야 하는 지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맨스를 기초로 배우자를 선택 하지 말라 그곳엔 함정이 있다. 그리고 당신의 부르심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부르심이 사장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이 고전 7장에 당부 한 것 처럼 남편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간을 쓴다. 그것이 부르심을 가로채 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르심이 같은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두번째 조건은 말이 통하느냐? 마음이 통하는가? 이다. 부르심이 같아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살 맛이 나겠는가?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내가 아퍼서 신음하면 그에 맞게 위로하는 아내가 필요 하지 않겠는가? 내가 기뻐하며 손뼉 칠때 그에 맞게 맞장구 치는 아내가 필요 하지 않겠는가? 내가 유머를 던지면 그 유머를 받을 줄 아는 사람이랑 같이 살아야 살 맛이 나지 않겠는가? 이것은 부르심을 수행하는 윤활제와도 같다. 자동차의 기어엔는 윤활제가 뿌려져 있다. 고속으로 회전할때 기어와 기어가 만나는 부분에 윤활제가 없다면 기계는 일찍 상하게 된다. 부르심을 위해 가는 고속 자동차가 쉼없이 그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윤활제가 필요 하다. 곧 마음이 통하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그속에서 우리는 부부사이의 일치감을 맛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분이지만 한분이신 것처럼 부부는 둘이지만 하나여야 한다. 그 하나됨에서 모든 것을 용납하고 덮어주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아 !! 부부란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섭리인가???

세번째 조건은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는가? 우리가 가장 첫번째 조건으로 내세우기 쉬운 것이다. 매력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겠지만 이성에게 느끼는 성적 매력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 기준은 육체를 극복 할때만 가능한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육체를 극복하지 않고 육체를 죽여야 한다. 솔직히 우리는 너무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다. 비단 배우자를 고를때 뿐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볼때 그의 외모보다 중심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저 자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 형상, 그 영혼의 아름답고 귀중한 가치를 발견 하기 위해서는 외모를 뛰어넘는 눈이 필요 하다. 진정한 매력은 외모에서 오지 않고 마음의 중심에서 온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세번째 기준에도 적합한 배우자를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수많은 기혼자들의 증험은 매력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따라와야 하는 것이지 매력에 의해서만 결혼 상대자를 결정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고 내가 결혼에 대한 환상이 심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내 기준이 많이 허구적이라는 것을 발견 했다. 결혼은 실제적인 것인데도 불구 하고 나는 '그 숲속의 잠자는 미녀'를 찾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조건으로 가지 치기를 하면 우수수 하고 많은 가지들이 쳐지고 두번째 조건으로 가지를 치면 또 우수수 하고 가지들이 쳐질테고 남는 것은 얼마 안 될 텐데...

여전히 나는 somewhere and someday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까 하는 공상에 빠져 있었다. 공상에 빠져 있으면 자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나의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아니 꼭 그렇게 되야 한다.



주님께서 내 갈빗대를 취해서 만든 사람과 사랑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날 지으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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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두번째 이유, 내 목적인 배우자를 위하여 어느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이것을 생각할 수 있는 나 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