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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Strom/너의 생각들

귀신은 무엇인가


귀신은 무엇인가 <1> 기독교적 귀신론/ 최대광 목사

‘오늘 우리들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모들아카데미와 종교문화연구원, 한신대학교 신학연구소 등 3개 종교 연구소가 지난 18일 오후 6시 서울 수유동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최대광 목사(감신대 강사)의 ‘기독교적 귀신론’을 시작으로 론 ‘열린인문학강좌’를 열었다. 여러 종교의 귀신론을 알하보는 세미나형 강좌다.

 이 강좌는 △원불교 원영상 교무의 ‘일본의 천황제와 귀신론’(6월8일) △열린선원 원장인 법현 스님이 ‘불교적 귀신론’(7월13일) △무녀인 정순덕 씨와 김동규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박사 공동의 ‘무당이 보는 귀신’(8월3일)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이 ‘귀신과 귀신 담론’(9월7일) △종합 토론(9월25일)으로 이어진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최대광 목사가 발표한 ‘기독교 귀신론’  

 

 1. 귀신 담론 

  침례교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를 받았고, 한기총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가 최근에 다시 이단이라고 분류된 김기동 목사는 귀신을 ‘불신자들의 사후 영’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타락한 천사도 포함해서, 불신자들의 사후 영과 타락한 천사를 포괄하여 ‘귀신’이라고 했으며, 더욱이 성서에 근거해서 모든 병의 원인을 귀신의 소행으로 돌린 것이다. 일정 부분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귀신을 쫒아 내는 일이 그의 사역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적’으로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는 것으로, 그 귀신을 쫒아 낸다면, 병도 치료된다는 것이다. 김기동 목사는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귀신이 감기약과 페니실린에 약하단 말인가? 사실, 신약성서 시대에는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했다. 페니실린이 발견된 지도 얼마 되지 않고 (약 100년 전이다!), 정신분열증과 신경증, 강박 등의 정신병적 질환도 의학의 범주에 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병에 걸린다면 그 누가 목사를 찾아가는가? 현대에 있어서 병은 의사의 영역이다.

 

 정신병과는 다른 영역의 귀신들림 존재 

  그러나, 정신병과는 다른 영역의 귀신들림이 존재한다고, 교회 안에서는 말한다. 밤마다 귀신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교회에 다니면서 차츰 안정을 찾았다는 일, 집안에 존재하는 귀신 때문에 병마에 시달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다가 귀신을 몰아냈을 때, 병과 우환이 사라졌다는 일, 교패를 붙인 집에는 귀신이 들지 않는다는 믿음, 기도원에 갔다가 귀신이 들려서, 목사와 신도들의 기도로 악귀가 물러간 이야기, 귀신은 예수의 이름 앞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 등등이다. 정신병은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서 치료가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귀신이 들린 사람은 바로 치료가 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귀신에 대한 담론은 교회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속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케이블 방송에서 만신에 의해서 귀신이 소개되고 있다. 신문 특히 스포츠신문 곳곳에 점을 보는 무속인들이 곳곳에 소개되고 있으며, 이들은 버스의 의자 커버에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지상파에서도 귀신에 대한 담론이 소개된 프로그램, 곧 <토요미스테리>, <이야기 속으로>, <전설의 고향> 등등이 그것이다. 대학가 앞에는 사주카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 귀신의 세계관이 주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철학과 만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문화가 과거 미아리고개에서 대학가와 일상으로 침투하고 있다.

 

 기독교와 무속 세계관 결합된 한국, 귀신과 마귀 복잡하게 얽혀 

   21세기로 접어든 지 이미 1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귀신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김기동 목사는 ‘기독교’의 귀신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한국의 무속적 귀신이해와 상당부분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귀신을 ‘타락한 천사’와 함께 ‘불신자의 사후 영’ 곧 죽은 자의 영혼이 구천을 떠돌다 사람에게 들어가 질병과 길흉화복을 주관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이나 개역 개정판 그리고 표준 새 번역에서 말하는 ‘귀신’은 실질적으로 악령이나 마귀 (demon)이며, 귀신 들린 사람은 demon-possessed one이다. 곧 ‘악령’ 들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육체와 영을 인정하고 있는 기독교에서는 무속적 세계관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으며, 이 두 세계관이 결합된 현금의 한국 기독교에서는 필연적으로 김기동 목사와 같은 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귀신’이란 죽은 이들의 영이 아니고, 마귀이다. 김기동 목사에게, 그리고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귀신과 마귀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이 둘의 세계관을 이해해 본다면, 확연히 다른 세계관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무속적 세계관과 기독교의 세계관의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2. 한국의 무속적 세계관  

  한국 무속의 신론은 애니미즘 곧 ‘물활론’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의 과학에서는 ‘물질’은 물질이요 ‘정신’은 정신이다. 실은 이 두 가지를 이분법적으로 정립한 이가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이다. 물질은 물질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자기원인을 가진다는 생각으로 정신적 세계관과 물질적 세계관의 영역을 자율화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의 과학이 물질에 기초한 유물론을 발전시킨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세계관이 출현하기 전에는 정신이 물질 형성에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 보편적 믿음 이었다.

  이 애니미즘, 곧 모든 물질에는 ‘영혼’이 있다는 사고방식은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타일러에 의하면, 원시인들이 ‘꿈’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출현하였다라고 했다. 꿈이란, 영혼이 몸을 벗어나 자유로이 움직이며 천상과 지하를 경험하는 것이라는 원시적 믿음이 단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나 무생물에게도 ‘영혼’이 있어 꿈을 통해 동식물의 영혼들과 만난다는 믿음을 성립 시켰다. 그에 의하면 샤먼의 지하와 지상의 여행은 꿈 여행을 확대 해석한 것이다. 엘리아데식으로 말하자면, 샤먼은 엑스터시의 기술을 통해 몸을 벗어난 영혼의 자유로운 여행을 하면서, 동식물과 바위, 천둥, 구름, 하늘에 내재한 영혼들을 만나고 현세의 길흉화복과 미래를 예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는 수 많은 영혼이 곧 만신이 깃들여져 있다는 세계관이 샤머니즘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이다.

 

 무속에선 죽은 자의 영혼, 상황과 때에 따라 선과 악 넘나들어

 

  이 세계관은 문화와 문명이 성립하면서, 또한, 자연의 위계를 상상하면서, 영혼의 상하구조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것이 신과 영혼의 위계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케렌 암스트롱은 그러나, 이 ‘신’의 위치는 인간과 너무 동떨어진 초월의 영역에 있다고 하였다(평민이나 노예가 왕과 소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을 상상해 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친지나 부모의 영혼이나 가까운 자연의 ‘애니마’(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기묘한 모양의 바위인 미륵)에게 의지하여 복과 미래를 기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영계’와 ‘현실계’를 자유로이 왕래하며 복과 예언을 하는 사람이 샤먼이라는 것이다.

  한국 무속의 ‘귀신’은 이러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귀신은 다름아닌 죽은 자의 ‘영혼’이며 무당은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현세의 복락을 점하고 치유한다. 치유의 방식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담아내고 있는 귀신(들)을 달래 저승으로 보낸다든지, 애니마를 원래의 위치에 놓는다든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한을 풀어준다든지 하는 형식인 것이다. 이 ‘귀신’은 ‘선’과 ‘악’이라는 가치론적 구조에 통제를 받지 않는다. 상황과 때에 따라 선과 악은 결정된다는 것이다.

  

  3. 기독교의 귀신론

  

  무속적 세계관과는 달리, 기독교적 세계관은 하나님과 마귀의 대립을 통해 악령을 설정한다. 한국의 무속과는 달리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마귀는 마귀다. 곧 선은 선이며 악은 악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귀’의 기원은 무엇일까? 사실 이 질문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버튼 러셀의 4부작 ‘악의 역사’에서는 이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기독교의 신정론과 속죄론의 역사를 건드리고 있다. 곧 기독교 신학의 문제인 ‘악의 문제 Problem of Evil’가 위의 대저의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문제 제기다. 즉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는데, 악은 왜 존재하는가?” 바로 이것이다. 마귀의 기원과 악의 문제, 그리고 신정론은 같이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악의 문제 해결이 기독교 신정론 전제이며 동시에 딜레마 

  정통 기독교에서는 유대 신명기 학파의 기본적인 전제, 곧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4-5)를 따르고 있다. 유일한 여호와, 곧 다른 신이 없이 오직 여호와만이 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오직 그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신명기 신관의 범주에 의하면 여호와를 제외한 어떠한 초월적 존재나 혹은 영적 존재는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난다. 첫째, 하나님이 유일함에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 신정론의 기본적인 전제이며 동시에 딜레마다.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고, 신의 절대성만을 상정한다면, 신은 너무나 잔인한 존재가 된다. 뉴스의 지면을 잠식하고 있는 연쇄살인, 강도, 강간, 대량학살, 원자탄, 킬링필드 등등, 상상하기도 싫은 잔인성의 역사가 인간과 함께 해 왔는데, 이들의 출발점은 과연 어딘가 하는 점이다. 성서 안에서도,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가나안 민족들을 거의 도륙하는 장면들이 출애굽기,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기를 뒤덮고 있다. 어쩌면 신은 악마와 동형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여호와는 그들의 신이지만, 가나안 부족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그는 악마다. 이 악마와 신의 동형론적 형태는 유목민족이었던 히브리인들이 국가를 만들면서 서서히 이분되기 시작한다. 신의 선한 면에서 어두운 면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 신명기 기자가 전제로 한 ‘유일한 하나님’은 언제나 걸림돌이다. 신이 유일하다면 악은 어디서 출발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후기 유대사상의 중심주제인 ‘천사론’이 등장한다.

 

 성에 눈이 어두워 타락한 천사들이 마귀 곧 악령

 

  창세기의 앞 부분에 보면 ‘네피림’이라는 거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이디오피아에서 발견된 외경 ‘에녹서’는 신구약 중간시대인 마카비 시대에 씌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천사가 언급되어 있고, 창세기에 기록된 네피림의 기원이 수록되어 있다. 후기 유대사상으로 씌어진 책의 내용으로 볼 때, 악의 기원을 천사론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며, 이것은 유대의 사상가들이 신명기서에서 언급된 유일한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신정론적 노력이 엿보이는 것이다. 다양한 천사의 이름이 언급되며, 지상의 여인들을 탐한 타락한 천사들이 나타나고, 이 타락한 천사와 지상의 여인들 사이에서 탄생한 존재가 ‘네피림’이라는 거인이라고 한다. 성에 눈이 어두워 타락한 천사들이 마귀 곧 악령이 되면서, 유일신의 모습에서 ‘악’의 모습이 제거되고, 타락한 천사가 ‘악’의 근원이라는 세계관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사야서 12장 12절에는 ‘빛나는 계명성’이라는 부분이 나타나는데,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한 구약성서에서는 이를 ‘루시퍼’라고 명명하고 있다. 즉 후기 유대사상에서는 이 악의 위계가 나타나게 되는데, 루시퍼를 정점으로 한 타락한 천사가 악령이 되며, 하나님에게 반대한 이 악령들이 악의 근원이라는 해소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타락한 천사들이 상하의 위계가 있듯이, 기독교, 특히 동방의 기독교는 위디오니시우스가 체계화한 9개의 천사 등급을 설정해 놓았다. 상위 3계급은 세라핌, 케루핌, 투론츠이며, 도미니온즈, 바슈츠, 파워즈, 프린스 벨리테즈, 아크엔젤스 (천사장), 엔젤스 (천사)가 있다. 물론 동방과 서방의 교회내 위계를 반영하는 것인데, 가장 윗 계급인 세라핌에 소속되어 있던 루시퍼가 악마의 수괴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과 악령과의 투쟁장, 예수는 그 싸움 끝내려고 내려와

 

  루시퍼를 정점으로 한 타락한 천사는 악령이 되어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질렀고, 죽음과 질병이 인간에게 들어왔다. 그리고 사탄의 활동으로 지상의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사탄을 멸하기 위해 그들을 영원히 가둘 지하의 감옥을 만들어 냈다. 즉, 세상은 하나님과 악령과의 투쟁장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 과정의 중심에 선 것이 아니고, 역사는 하나님과 악마와의 우주적 투쟁장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 투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이 땅으로 내려온 하나님이 된다. 교회의 전통에서 이 악마는 검은 피부에 뿔이 달려 있으며 날개를 가지고 있다. 검은 피부는 선을 상징하는 빛의 반대이고, 뿔이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레위기서에 등장하는 속죄 염소를 표현하고 있다. 대 속죄일이 되면, 염소에게 온갖 죄를 덮어 씌운 뒤 광야로 보낸다. 즉 그 염소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담지하고 있는 동물이다. 그래서 사탄은 염소의 뿔과 다리를 가지고 있다. 날개가 달렸다고 하는 것은, 공중권세를 뜻한다. 이 공중권세를 지닌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하지만 예수는 이를 극복하고 (마태복음 4:1-11), 제자들은 공중권세를 지닌 사탄을 지상으로 끌어 내린다 (누가복음 10:12절). 그러나, 그들은 이제 지상의 권세를 지니게 되었고, 인간들에게 온갖 질병과 아픔의 원인이 된다. 이제 예수는 지상의 사탄을 멸하는 치유를 하게 되고, 이 땅에 하늘나라를 완성하는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다. 그 최후의 순간이 십자가다. 자신을 죽음으로 악령의 지배를 부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사후에도 악은 계속 활개…재림 사상 출현 

  그런데, 문제가 나타난다. 예수의 사후에도 악은 계속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이 ‘악’의 시각에서 볼 때에, 비로소 ‘재림’의 사상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다시 와서 악의 세력을 처단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궁극적으로 지하의 감옥에 영원히 갇히게 되며, 지상과 천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성립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상이 헬레니즘적 철학 사유를 거치면서, 더더욱 복잡한 신정론적 논쟁들이 나타나게 된다. 기독교가 학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면서, 구약과 신약을 일관적으로 설명하려는 신학적 노력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천사의 타락을 가능케 한 ‘욕망’은 어디에서 출현하였는가? 아무리 루시퍼로 나타난 반란자가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악’이 존재 해야지 ‘반란’이고 뭐고 가능할 것 아닌가? 헬레니즘은 대체로 선과 악의 이원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나님이 빛이시면, 악마는 어둠이고, 하나님이 생명이시면, 악마는 죽음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다스리시지만, 악마는 죽음을 다스린다. 그래서 지하의 무저갱, 곧 악마를 벌주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지옥’이 악마의 거주지가 되며, 이곳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벌’주는 악마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악마는 하나님의 뜻, 곧 악인의 지옥행을 완수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 신화를 결합시킨 것이다. 분명히 이러한 문화적 배경 하에서 기독교의 사도신경이 탄생했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보다 훨씬 이후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사도신경의 원문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지옥에 내려갔다고 한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도하고 사흘 후 부활했다는 것이다. 성서 안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보편성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하늘 위에 계신 보편적 존재이며, 이는 하나님과 인간을 엮고 있는 존재이다. 예수는 사탄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은 ‘죄’ 있는 자들만 들어오는 곳이다. 죄 없는 그가 그곳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제 완전한 ‘어둠’이라는 의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낚시바늘과 같이 묘사했으며, 바다괴물로서의 사탄인 레비아탄이 그 십자가를 물고 하나님께 낚이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마침내 지옥도 사탄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며, 최후에 인간들은 구원을 받고 사탄은 그곳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후에 오리겐이라는 신학자로 하여금 종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 갇힌 자들은 물론 악마까지도 구원을 받는다는 상상을 만들어 내었다. 일자로 출발했으니, 일자로 회귀하는 과정이 창조와 종말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신은 무자비하거나 무기력하거나…신학자들 ‘모순의 틀’ 번뇌 

  헬레니즘 하에서 기독교가 탄생하면서 나타난 영지주의는 초월적 신을 상정하고, 이에 열등한 창조신을 설정하며, 세상의 물질은 악한 것, 이를 초월한 영적인 것은 선한 것이라는 이분법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정통’기독교, 그러니까 ‘유일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기독교는 악의 문제와 씨름하게 된다. 위에 기본적으로 던졌던 질문 곧 신정론을 따른다면, 두 가지의 모순점이 생겨난다. 신만이 존재하고 악이 없다면, 신은 무자비한 존재고, 절대적 선이라면 신은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악’의 문제를 상정할 때, 도대체 이 ‘악’이 어디에서 출현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동방 기독교 전통의 뿌리가 된 닛사의 그레고리와 디오니시우스는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여, 창조를 ‘유출’로 이해한다. 절대선에서 유출된 세상, 혹은 신의 사랑에서 폭발한 마그마가 흘러나오는 것이 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마그마는 뜨거운 온도를 지니고 있지만, 산 밑으로 내려오면서 식어간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모두 용암인 것이다. 즉 악은 ‘사랑’의 결핍, 혹은 “창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일 뿐이다. 어거스틴도 이에 힌트를 얻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선이 결핍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선의 결핍인 ‘악’이 존재할 때, 우리는 수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철학적 추상으로 ‘악’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에 실질적인 ‘악’이 존재하게 되는가? 그리고 속죄론의 구조로 옮겨간다면, 왜 존재하지 않는 선의 결핍으로의 ‘악’을 위해 예수가 죽어야 했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선의 결핍인 ‘악’, 곧 현실적 악이 출현하는가? 어거스틴과 그레고리의 신정론적 시각에서 볼 때, 속죄는 필요없게 된다. 속죄를 위해서는 분명한 악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이 두 가지의 모순된 틀에서 번뇌하였고, 이 두 가지를 적당히 섞거나 (요즘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처럼) 하였다.

 

 속죄론에 치우치게 되면 신의 절대성이 흔들려 

  종교개혁의 시대에 들어왔을 때, 루터에게 사탄은 하나님의 징계를 대신하는 악역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모순, 절대적으로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과 만나게 된다. 무자비하게 잔인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 루터는 기독교 성서 로마서의 전통에 서서 모든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는 존재가 아니고, 그의 뜻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한다. 분명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숨겨진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신정론적 전통에서는 신의 절대성이 인정되며 악은 선의 결핍이거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신의 절대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렇게 되면 속죄론에 걸리게 되며, 한국과 전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 곧 악령의 현상에 응답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속죄론에 치우치게 된다면, 신의 절대성이 흔들린다. 이 양면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결국 기독교 신정론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명확한 결론을 이루어 내지는 못했을지라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귀신은 ‘타락한 천사’인 악령이며, 이들은 하나님과 적대적이기도 하나, 때때로 우리가 처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 원인이 되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의 종말에 가서 악마가 무저갱에 들어 가듯이, 우리의 고난은 극복될 것이다. 최후에 악령은 지옥에 갇히게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절대적인 완성의 시대에 거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정론, 종말론까지도 포함 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의 귀신론 곧 악령론의 결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