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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Strom/너의 생각들

[펌]노무현, 운명으로서의 죽음

노무현, 운명으로서의 죽음

[노무현을 기억하며] 기꺼이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와 노무현

기사입력 2009-05-29 오후 5:26:47

"자신을 사랑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하게 된다." (출처 :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세상에 분노한다. 대통령 노무현, <화려한 휴가> 보고 울다」, 오연호 리포트: 인물연구 노무현 7, - 오마이뉴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살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비열한 정권의 '법치'(rule of law)라는 탈을 쓴 '법을 수단으로 한 (억압적) 지배'(rule by law)의 압박 때문에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당하고 조롱당하는 현실 앞에서 그도 결국 한 나약한 인간으로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고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평생을 자의식 강한 '바보'로 살아오면서 씩씩하게 버티어 왔던 강인한 사람이 그 혐오스러운 전두환 따위에게서 '좀 더 꿋꿋했어야 했다'는 핀잔을 들어야 할 정도로 나약했을 리가 없다.

정치적 타살임에도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정말이지 얼마 전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조차도 자신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잔인하고 야비한 사회임에 틀림없다. 이명박 대통령과 권력의 하수인이 된 정치검찰, 그리고 수구언론들의 비열하고도 집요한 공격에 그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던 게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공격을 하루 이틀 당한 것도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닌데, 그가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맥없이 무너졌을 것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을 '소신공양'이란다. '순교'라고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측근들을 위해, 국민들을 위해,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위해, 혼돈에 빠진 역사가 제대로 방향을 잡도록 하기 위해 살신성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이 비종교적인 사람에게는 그런 종교적인 이해가 어쩐지 거북하다. 더구나 역사 속에서 종교적으로 이해된 정치가 때때로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자살테러), 그런 이해가 반드시 그 죽음의 숭고함을 더 평가하게 해 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열사'는 어딘가 이상했다.

며칠을 생각하고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아무래도 내겐 그 죽음은 역시 자신의 표현대로 '운명'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운명으로서의 그의 죽음을 우리가 좀 더 제대로 이해해 낼 때 우리는 그를 더 잘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운명으로서의 죽음은 어떤 오이디푸스의 죽음 같은 것이 아니다. 사주팔자에 정해진 그런 죽음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를 아는 자의 치열한 죽음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초라한 자기연민이 아니다. 그것은 비로소 '자기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고 '자기를 배려'하는 것이다. 남이 던져준 삶, 남이 틀 지워 놓고 강요한 그런 삶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되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자기가 엮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는 자기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진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과 상호인정의 지평 속에서 비로소 자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나 쉽게 자기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가 되려는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응시를 받고 그래서 그 시선을 두려워하고 결국 그 시선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욕망을 갈망하고 다른 사람의 의지를 의욕하며 다른 사람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추구하면서도 자기의 삶을 산다고 착각한다. 참으로 자기의 삶을 사는 사람, 자기가 주인공인 삶을 살려는 사람은 당연히 그런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과의 불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과 결의는 삶에서 그저 단순한 안일과 행복 같은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세속적인 의미의 구원 또는 해탈을 꿈꾸는 삶을 의미한다.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함을 의미한다. 세상의 기준, 대개는 돈 많고 힘 센 타인들의 시선이 만들어 낸 삶의 틀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류'에 속하기를 기꺼이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상의 멸시와 배제를 각오해야 한다. 때때로 '바보'가 되어야 한다.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이처럼 무턱대고 세속적 보상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세상에 분노하고 세상과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 싸움의 노정, 끊임없이 새롭게 점검되고 다듬어져야 할 그런 싸움의 기획, 바로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배려하며 자기의 삶을 살려는 사람의 운명이다.

물론 이렇게 세상과 불화하는 삶에 대한 추구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자기만의 세상 속에 유폐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이나 세상의 평가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바보 노무현이 말했듯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도 자신의 삶이 성공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속물들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운명'이 아니었을까. ⓒ'사람사는세상'
오히려 자기를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 자기에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사랑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권세나 돈을 통해 자신을 뽐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남으로부터 존중을 받을 수는 없다. 그는 시기나 원한의 대상일 뿐이다. 그의 영예는 나의 수치심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나와 똑같은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하는 사람만이 타인으로부터 진정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만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존엄의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 다름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바로 어느 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고자 결심했던 인간 노무현의 운명이다.

그러나 자기의 삶을 살려는 사람이 겪는 세상과의 불화는 단순히 그의 주관적인 불화가 아니다. 세상과의 불화는 바로 '남의 영예를 나의 수치심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 존엄의 평등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 자신을 뻐기고 싶어 하기는 해도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속물'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들과의 불화다. 속물들은 자신만의 진정성 있는 삶의 차원을 모른다. 따라서 자기를 사랑할 줄도 배려할 줄도 모르고, 그리고 바로 그래서 남을 존중할 줄도 모른다. 그저 남들이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무슨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어떤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세상의 중심에, 상층부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 중심이나 상층부에 속하지 않는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발가벗고서라도 그 중심과 상층부로 가는 끈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한다.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 부끄러움 따위를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힘세고 더 가진 사람에게는 한 없이 비굴하면서도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을 갖출 리가 없다. 자신들이 닮고자 하는 남들은 언제든 밟고 일어서야 할 경쟁자로 여기면서 자신들이 배제하고 무시하는 못난 남들의 응시는 그저 가련한 시기와 원한의 표현으로만 받아들인다. 낯 두꺼운 몰렴과 무치, 그것은 그들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훈장이다. 새디스트적 비열함과 잔인함, 그것은 그들의 영광을 확인하는 전리품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따돌림과 무시와 모욕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인간-맹(盲)이다.

안타깝게도 그들로부터 늘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도 다름 아닌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됨으로써, 스스로 속물이 되려함으로써 그 무시와 모욕을 벗어나려 했다. 그래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나왔다. 그래서 너도나도 부동산 투기며 펀드 열풍에 가담했다. 또 그래서 사람들은 무턱대고 자신들을 부자 만들어 주겠다는 누군가에게 투표했다. 이명박 정권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제 어떤 토탈-스놉의 사회, 인민(demos)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데모크라시가 아닌 속물들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스노보크라시(snobocracy)가 바보 노무현 같은 사람이 불화해야 하는 사회의 정치적 형식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무현 같은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세상과 불화하지 않는 삶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삶이다. 제대로 죽어야만, 세상과 극단적으로 단절해야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존엄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지킬 수 있다. 그저 살아남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될 수는 없다. 그저 편안한 삶, 그저 즐거움으로만 넘치는 삶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이다. 그런 삶은 동물도 사는 삶이다. 물론 우리의 존엄성은 동물로서의 존엄성일 뿐이지만, 그러나 바로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도, 때때로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이 인간-맹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새디스터적 비열함과 잔인함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빨대' 검사들이나 기자들 같은 '악의 평범하고 자발적인 집행자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억압적 권력을 휘두르는 곳에서는, 그것은 거의 불가피하다. 사즉생, 곧 죽어야 사는 것은 그래서 바보 노무현에게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떤 '피안적(彼岸的) 재세', 곧 이 세상을 떠나서도 이 세상에 영원히 남는 길이었다.

노무현의 자살은 운명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정확히 소크라테스의 죽음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고 있음을, 그래서 자신과 나라를 모두 망치고 있음을, 게으른 말에 붙어 다니는 등에처럼 윙윙거리며 깨우치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했던 소크라테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당대의 주류와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았고 동료 시민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던 소크라테스, 그러나 악법도 법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운명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삶을 포기하고 기꺼이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 인간 노무현은 바로 오늘 이 땅의 소크라테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된다. 슬퍼해서도 안 된다. 다만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제대로 배울 것을 배울 일이다. 누구든지 진정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다 자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노무현이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대부분은 노무현처럼 아름답게 자살할 자격이 없다. 노무현처럼 뜨겁게 자신을 사랑하며 세상과 불화하고 또 그래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웠던 그런 삶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죽음은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다만 못난 우리가 이제 어떤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고 있을 뿐이다.

아직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진짜로 배려해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 운명이다. 진짜로 자기를 사랑하는 진정성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저 속물적 지배체제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삶은 남을 깔보는 데서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존엄의 평등이 실현되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며 사는 삶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이 욕지기나는 스노보크라시가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선전하는 '한갓된 삶'을, 그저 비루하기만 한 '생존'을 거부하는 삶이다.

소크라테스 또는 노무현은 말한다.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문제다.' 경쟁에서 도태되어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는 식의 불안에 사로잡혀 그저 살고자 그들의 노예가 되고 그들에게 그 불안의 의식을 착취당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저 살고자만 하면 우리는 존엄한 삶,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존엄한 삶이 될 수 있는지, 잘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 우리의 '차세적(此世的) 초월'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묻고 반성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에게 운명인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운명적 죽음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은 결국 단지 우리 자신들만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려 했던 것이다. 쌩큐, 노무현! 굿바이, 노무현!

/장은주 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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